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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_____[カトリック]

율리아노, 바울리나, 니콜라오 카톨릭성인

by 유성천국 2021.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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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노(1.27) 기본정보

성인명축일성인구분신분활동지역활동연도같은이름

율리아노 (Julian)
1월 27일
성인
주교
르망(Le Mans)
+3세기?
율리아누스, 줄리안, 줄리언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는 율리아노)의 전기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는 프랑스 르망의 초대주교이며 르망 지방의 사도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음은 사실이다. 7세기경에 성 율리아누스 주교 대성당이 세워진 것으로 보아 그의 생존은 그보다 더 이를 것으로 본다. 어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의 72 제자 중의 한 명으로 나환자 시몬(Simon)과 동일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성 율리아누스의 공경이 영국까지 전해진 것은 르망 출신인 헨리 2세 국왕의 개인적인 신심 때문이었다.

바울리나(고통 받는 예수 성심의)(7.9) 기본정보

성인명축일성인구분신분활동지역활동연도같은이름

바울리나(고통 받는 예수 성심의) (Pauline of the Agonizing Heart of Jesus)
7월 9일
성녀
설립자, 수녀원장
 
1865–1942년
비신타이네르, 빠울리나, 뽀리나, 아고니잔테, 아마빌레, 코라카오, 파울리나, 포리나


   고통 받는 예수 성심의 성녀 바울리나(Paulina do Coracao Agonizante de Jesus)는 1865년 12월 16일 이탈리아 북부 트렌토(Trento) 지방의 비골로 바타로(Vigolo Vattaro)에서 아버지 안토니오 나폴레오네 비신타이네르(Antonio Napoleone Visintainer)와 어머니 안나 피아네체르(Anna Pianezzer)의 딸로 태어나 아마빌레 루치아 비신타이네르(Amabile Lucia Visintainer)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지역의 다른 모든 사람처럼 그녀의 부모 역시 가톨릭 신자로서 열심히 살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1875년 9월에 그녀의 가족은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트렌토에서 브라질의 산타 카타리나(Santa Catarina) 주(洲)로 이주하여 오늘날의 노바 트렌토(Nova Trento) 지역에 속한 곳에 비골로(Vigolo) 마을을 건설하였다. 12살 무렵에 첫영성체를 한 아마빌레는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병자를 방문하며 비골로 성당을 청소하는 등 다양한 본당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 7월 12일 아마빌레와 그녀의 친구인 비르지니아 로사 니콜로디(Virginia Rosa Nicolodi)는 암으로 고통 받는 한 여성을 돌보기 시작했는데, 이로써 쿠리티바(Curitiba)의 주교인 호세 데 카마르고 바로스(Jose de Camargo Barros) 주교의 승인을 받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가 시작되었다. 그해 12월 아마빌레는 첫 동료인 비르지니아 로사 니콜로디와 테레사 안나 마울레(Teresa Anna Maule)와 함께 서원을 발하며 고통 받는 예수 성심의 바울리나(Pauline of the Agonizing Heart of Jesus)라는 수도명을 선택했다. 초대 원장이 된 성녀 바울리나와 동료 자매들의 거룩한 생활과 사도적 열정은 가난하고 불편한 생활 여건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소자를 이끌어 들였다. 1903년 종신 총원장으로 선출된 그녀는 상파울로(Sao Paulo)의 이피랑가(Ipiranga)에 사는 고아들과 노예 출신 아이들 그리고 늙고 소외된 노예들을 돌보기 위해 노바 트렌토를 떠났다.

   1909년 성녀 바울리나는 상파울로의 대주교 두아르테 레오폴도 에 실바(Duarte Leopoldo e Silva)의 지시로 총원장 직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수녀로 돌아가 더는 수녀회의 어떠한 주요 직책을 맡지 않고 산타 카사(Santa Casa)의 병자들과 브라간사 파울리스타(Braganca Paulista)에 있는 성 빈첸시오 드 폴 병원에서 노인들을 돌보도록 파견되었다. 이는 다년간의 기도와 노동과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었으나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수녀회를 위해 순명으로 받아들이고 인내했다. 1918년 두아르테 대주교의 승인을 받고 빈첸시아 테오도라(Vincencia Teodora) 총원장 수녀는 그녀를 이피랑가의 본원으로 모셔왔고, 그녀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며 기도와 병약한 수녀들을 사랑으로 돌보면서 조용한 삶을 살았다.

   1940년 7월 12일 수녀회 설립 50주년 기념식 중에 성녀 바울리나는 겸손하게 살며 어떠한 역경 중에도 용기를 잃지 말고 하느님께 충실할 것을 당부하는 영적 담화를 남겼다. 1938년 이후 당뇨로 인해 두 번의 수술을 받으면서 시력을 잃고 오른쪽 팔도 절단해야 했다. 심각한 건강 문제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인내하며 지낸 성녀 바울리나는 1942년 7월 9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도 선종하였다. 브라질 가톨릭교회의 첫 번째 성인인 그녀는 1991년 10월 18일 브라질의 산타 카타리나 주의 플로리아노폴리스(Florianopolis)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5월 19일 같은 교황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는 파울리나 도 코라카오 아고니잔테 데 헤수스(Paulina do Coracao Agonizante de Jesus)로도 불린다.

참고자료

  •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송영웅 옮김, 오늘 성인(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들) - ‘겟세마니 동산에서 고뇌하신 예수 성심의 성녀 파울리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14년, 259-261쪽.

 

니콜라오(12.6) 기본정보

성인명축일성인구분신분활동지역활동연도같은이름

니콜라오 (Nicholas)
12월 6일
성인
주교
미라(Myra)
270?-341년경
니고나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스, 니콜라우스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는 오늘날 지중해 연안 터키 남서부 지역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리키아(Lycia) 지방의 항구 도시인 파타라(Patara)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뛰어난 행적으로 인한 전설과 비공식 전기 등을 통해 오래전부터 교회 안팎에서 큰 사랑을 받아왔다. 그는 파타라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막대한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성 니콜라우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활동에 헌신했다. 가난한 이들을 더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 사제가 될 마음을 가질 정도로 그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성 니콜라우스가 사제품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미라(Myra, 오늘날 터키의 뎀레 Demre)의 주교가 선종했다. 후임자를 찾기 위해 주교들이 열심히 기도하자 어느 날 밤,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아침 성당에 맨 먼저 들어오는 ‘니콜라우스’라는 자를 뽑아라.” 다음 날 아침 성당에 기도하러 왔던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주교로 축성되었다. 얼마 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성 니콜라우스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면서 10여 년의 옥고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교회 재건과 이교도들의 개종을 위해 노력했고, 당시 성행하던 아리우스(Arius) 이단에 대항해 제1차 니케아(Nicaea) 공의회(325년)에도 참석했다고 한다. 그는 미라의 주교로서 뛰어난 성덕을 바탕으로 교구 내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 활동에 전념하면서, 동시에 놀라운 기적을 통해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을 구해주었다.

   성 니콜라우스의 선행과 기적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로는 어떤 아버지가 가난 때문에 세 딸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해 출가시키지 못하고 사랑하는 딸들을 매춘부로 넘겨야 할 곤경에 처했을 때의 일이다. 이를 안 성 니콜라우스는 그때마다 몰래 창문으로 금이 든 자루를 넣어 주어, 마침내 세 자매가 모두 정당하게 혼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 기근이 든 어느 해에 고약한 푸주한이 아이 셋을 살해한 후 소금에 절여 먹거리로 팔려고 할 때, 성 니콜라우스가 이들 세 어린이를 구해 소생시킨 일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기근으로 굶주리고 있던 어느 해에 식량을 가득 실은 여러 척의 배가 폭풍우에 밀려 미라 해안으로 떠밀려왔다. 이때 성 니콜라우스는 각 배의 선장에게 얼마간의 식량을 기증해 달라고 간청해서 굶주리는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출항 후에 식량을 살펴본 선원들은 그 양이 이전과 비교해서 전혀 줄지 않았음을 발견하고 놀라워했다. 그 외에도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사형에 처한 세 명의 청년을 구해주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에 나타나서 모함을 받아 위기에 처한 고관들을 구해준 일도 있었다. 그리고 물에 빠진 선원들을 여러 번 기적적으로 구해주기도 했다.

   이렇듯 성 니콜라우스 주교는 생전에 소외되고 불행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그래서 341년경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명성은 더 멀리 전 서방으로 퍼져나갔고, 그의 전구로 많은 기적도 일어났다. 그의 유해는 원래 그가 주교로 있던 미라에 있었는데, 이 도시가 아랍의 침략을 받자 1087년 5월 9일 이탈리아 상인들이 미라의 주교좌성당에서 이탈리아의 바리(Bari)로 옮겨와 경당을 세우고 그곳에 모셨다. 그러자 많은 이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찾아와 점차 유럽 최대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래서 유해가 이장된 해에 바로 대성당 건축에 들어가 110년간의 건축 기간을 거쳐 1197년 성 니콜라우스 대성당을 완성해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가 축성식을 거행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보통 ‘바리의 성 니콜라우스’로 불리게 되었다. 성 니콜라우스 주교는 그의 행적과 여러 기적으로 인해 어린이와 누명 쓴 죄수, 폭풍우에 갇힌 뱃사람, 항해사, 어부, 여행자 등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성탄절 때 어린이들에게 성 니콜라우스의 자선과 사랑을 기리는 뜻에서 그의 이름으로 선물을 주는 관습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성 니콜라우스는 네덜란드에서는 ‘신터 클레스’(Sinter Claes), 영어권에서는 ‘산타 클로스’(Santa Claus)로 불렸다. 중세 후기 유럽 전역에서 성 니콜라우스의 축일 행사가 성대히 거행되면서, 독일에서 처음으로 성 니콜라우스가 산타클로스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산타클로스의 붉은색 옷도 사실은 주교가 입는 빨간색 복장에서 유래했다. 현대에 와서 성 니콜라우스는 산타클로스로서 대중적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이는 네덜란드계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미국에 정착하면서, 성 니콜라우스 축일에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관습을 소개하고 이를 성탄 전야 행사와 함께하면서부터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성 니콜라우스는 어린이와 가난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 시칠리아, 풀리아(Puglia), 로렌(Lorraine), 러시아 등 여러 지방과 나라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도 성 니콜라우스는 그의 행적이나 기적과 관련해서 보통 주교 지팡이를 들고 주교관을 쓴 채 한 손에 세 개의 황금 구슬이 놓인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세 아이를 소생시키거나 무죄한 세 사람을 구하는 장면, 그리고 기적적으로 선원들을 구하는 모습 또한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주제이다.

참고자료

  • 고종희 저, 명화로 읽는 성인전(알고 싶고 닮고 싶은 가톨릭성인 63인) - '미라의 주교 니콜라오', 서울(한길사), 2014년, 481-492쪽.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미라의 성 니콜라오 주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05-108쪽.
  • 최익철 저, 우표로 보는 교회를 빛낸 분들 - '니콜라오', 서울(으뜸사랑), 2014년, 44-48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 '니콜라오, 미라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6년, 1478-1479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6권 - '산타 클로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8년, 4142-4143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니콜라오 주교', 서울(성바오로), 2002년, 304-305쪽.

 

< 출   처  :     Good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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